泗川倭城(船津里城)  
   

  소재지 : 사천시 용현면 선진리 402번지 일원
문화재 자료 : 제27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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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성(城)은 왜성(倭城)으로 정유재란(丁酉再亂)때 왜군(倭軍)이 사천지역(泗川地域)을 장악한 후 이곳을 중요거점으로 삼기 위해 당시 왜장이 었던 모리길성(毛利吉成)으로 하여금 왜성(倭城)을 구축했다는 도진가기(島津家記)에 기록이 있다.
사천읍에서 서남쪽 약 7km지점, 남북으로 길게 뻗은 사천만의 동안(東岸) 중간지점에 위치하고, 구능(丘陵)의 지형(地形)을 이용하여 구축(構築)한 평산성식(平山城式)의 토축으로 된 창성(創城)이다.
사천왜성(泗川倭城)이 위치한 선진공원 주변은 북서쪽이 높고 동쪽과 남쪽이 낮은 독립구릉에 해당된다.
또한 서남북(西南北)의 삼면(三面)이 바다에 임(臨)하고 東쪽 一面만이 육지(陸地)로 通하는 그야말로 난공불락(難攻不落)의 수륙요새(水陸要塞)였다.본환의 북서쪽 모서리부분에 평면상태의 방형이고, 동쪽으로는 장방형의 부곽을 붙인 천수각이 보이며, 본환의 서쪽과 북쪽은 곽을 하나만 두었으나 남쪽과 동쪽은 두 개의 곽을 두었다. 이지환은 본환에서 동쪽으로 80m정도 떨어져 있으며 별다른 시설은 없고, 주차장건설로 인하여 파괴가 심한 편이지만 이지환의 남쪽과 동쪽에서 석축이 확인되며, 평면형태는 梯形을 띤다. 삼지환의 정확한 위치는 현재로서는 알 수 없다.
본환이 위치한 선진공원은 왜성(倭城)을 축조하기 전 원래의 지형은 서쪽과 동쪽이 높고 남북방향으로 소곡을 형성하고 있기 때문에 왜성을 축조하기 위하여 지형이 높은 서쪽과 동쪽을 삭평하여 소곡을 메웠던 흔적을 확인 할 수 있다. 그러나 지금은 간척사업(干拓事業)으로 인하여 남북의 이면(二面)은 모두 농경지(農耕地)로 변하고 서쪽 일면(一面)만 바다로 연해 있으며 성지(城址)는 모두 밭으로 개간(開墾)되어 고지(高地) 일부(一部)만 공원(公園)으로 조성되어 있다.
"고려초(高麗初)에 설치한 고통양창(古通陽倉)은 현의 남쪽 17里 통양포상(通洋浦上)에 있고 부근(附近) 고을의 조세를 거두어 서울(당시는 開城)로 조운(漕運)하였으니 곧 12조창(漕倉)의 하나로 지도도 둘레 3,086尺의 토성(土城)터가 남아 있다" 라고 기록되어 있다. 거리 17里규모이고 ,조세를 거둬들인 창(倉)이 있는 점, 토성지(土城址)3,086尺의 규모이다.
천수각은 생토면까지 정지한 후 10㎝ 정도 암갈색사질점토을 깔았으며, 그위로 60㎝~120㎝ 정도의 부정형 할석을 이용하여 난적쌓기를 하였으며, 또한 북서쪽과 남서쪽 모서리는 심하게
붕괴되어 있는 편이며, 천수각 주변에 다량의 와편과 소토가 혼합된 층이 확인된다.임진왜란시 이 왜성(倭城)을 중심으로 바다와 육지에서 두 차례의 큰 싸움이 있었다. 그 하나는 해전으로서 선조(宣祖) 25年(1592) 5月 29日 함선(艦船) 23척을 이끌고 여수본영을 떠난 전라좌수사(全羅左水使) 이순신(李舜臣)은 선진(船津) 앞 바다에 이르러 거북선(거북선)을 앞세워 왜적과 치열(熾熱)한 싸움 끝에 적선(賊船) 13척을 모조리 쳐부수는 전과를 올렸으니 이 싸움이 李忠武公의 제2차 사천해전이며 이때 해전사상처음으로 거북선이 등장(登場)하였다. 다음은 육전으로서 정유재란때인 무술년(戊戌年 1598) 10월 초하루 明나라 중로제독 동일원(中路提督 동一元)은 마병(馬兵), 보병으로 구성된 전병력(全兵力)을 동원(動員)하여 이 왜성(倭城)을 공격했다.
적은 8,000여 병력(兵力)으로 아군(我軍)의 1/4정도였다. 이때 보병유격장 팽신고(彭信古)는 적의 성채(城寨)를 공격하던 중 진중(陳中)에서 화포(火砲)의 오발로 탄약궤에 인화(引火)되어 화염이 치솟고 아군(我軍)이 혼란에 빠지자 효기(效機)를 포착한 성채(城寨)의 적이 역습(逆襲)으로 나와 먼저 팽신고의 포진지(砲陣地)를 유린하였다. 이때 유격장 모국기와 엽방영(葉邦?)이 성채(城寨) 북쪽의 고지에서 잔병을 수습 적 출격대의 배후(背後)로 돌아 왜성으로 돌진(突進)하여 사천왜성(四川倭城)에서 나온 적을 괴멸직전까지 몰아 넣었으나 아군은 먼저 기병제
장의 전열이흩어져 북으로 패주(敗走)했다.이 싸움에서 아군(我軍)은 수많은 희생자를 내었으며 당시 치욕(恥辱)의 전흔이 지금의 사천왜성(四川倭城)어귀에 위치한 조명군총(朝明軍塚)이다. 사천왜성(泗川倭城)은 일제(日帝)때 일제당국에 의해 임진왜란시 일본군(日本軍)의 전승지라 하여 관심을 끌은 바 있고, 1936년 5월에는 이 성지(城址)를 고적(古跡) 제 81호로 지정(指定)하기도 하였다. 그 후 1963년 1월 21일자로 사적 제 50호로 지정되었으나 다시 1998년 9월 8일자로 지방문화재 자료 274호로 지정되었다
무술전투당시 왜장이었던 도진의홍(島津義弘)의 후예(後裔)들이 1918년경 이성터의 일부를 매수(買?)또는 기부(寄附)받아 공원(公園)으로 조성(造成)하고 공원정상에다 사천신채전첩지비라 새긴 비석(碑石)을 세웠으며, 때때로 일군(日軍) 장성들이 그들 조선(祖先)의 전적지라 하여 돌아보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 비석(碑石)은 해방(解放)되던 그해 주민(住民)들에 의해 파괴되었다. 다만 그때 심은 벚나무 천여주(千余株)가 오늘에 이르고 있다.
한편 사천시에서는 1978년 사업비(事業費) 4,700여만원을 들여 공원경내에 이충무공 사천해전승첩비를 세우고 충무공(忠武公) 이순신(李舜臣)이 이 곳 선진(船津) 앞바다에서 거북선을 처음으로 사용하여 왜선(倭船)을 격파한 국난극복사의 현장(現場)임을 알려주고 있다.
또 천수각(天守台)의 자리에는 6.25 전쟁때 산화(散華)한 공군장병 전몰자(의 호국정신을 기리는 충령비가 우뚝 서 있다.
경내에는 편의시설 2동(棟)과 돌계단 70m 가 설치되어 있고 공원입구(公園入口)에는 넓은 주차장(駐車場)의 편의 뿐 아니라 공원(公園)으로서의 면모(面貌)를 새롭게 하고 있으며 야외공연장(野外公演場)도 마련하여 공원을 찾는 단체 및 학생들의 공연장으로도 활용하고 있다.
현재 사천왜성(泗川倭城)은 발굴조사가 한참진행 중에 있다.
경남문화재 연구원의 직원 들이 추운 겨울에도 발굴 작업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매년 3~4월이면 벛꽃이 절정을 이루고, 벚꽃축제도 하고 있습니다.

주변관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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