蔚山倭城 (鶴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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蔚山倭城은 宣祖30年(1597) 加藤淸正(가등청정)가 10월부터 1만 6천명을 동원하여 40여 일만에 蔚山邑城과 兵營城의 돌을 헐어다가 쌓은 일본식 성이다. 蔚山市 中區 鶴城洞 학성산에 축성한 것이고 독립구릉으로 형성된 야산으로 해발 50m정도이다.
鶴城은 신라의 계변성(戒邊城)이라 하던 성에 정유재란 때 왜군에 의해 새로 축성 된 倭城인데 조선에서는 이를 도산성(島山城)이라 불러왔다. 이 성을 鶴城이라함은 신라말에 천신(天神)이 학을 타고 이 신두산에 내려와 고을 사람들의 수록을 주장하였다 하여 신학성(神鶴城)이라 하다가 뒤에 학성(鶴城)이라 한데서 유래하였다.
 
이 왜성(倭城)의 규모(規模)는 다음과 같았다.
해발 50m인 산꼭대기에 본성(本城)을 두고, 본성 북쪽 아래에 제2성(第二城:해발 35m)을 두었으며, 그 아래 서북쪽에 제3성(第三城: 해발 25m)을 두었다. 세 성벽의 길이를 모두 합하면 1,300여m이고, 성벽의 높이는 10 ~15m였다. 또 성밖에 동 북 서쪽으로 2,400m의 목책(木柵)을 세워 2중 성곽으로 만들었으나 지금은 없다. 本城은 남쪽을 점령 높이 50m 동서 100여m 남북 600m이고, 제2 本城은 본성 북쪽 좀 낮은 곳, 동서 100m 남북 100m이고, 제3 本城은 二之丸 서북쪽, 동서 40m 남북 100m 석
 
벽의 길이 1.300여m, 높이 10~15m 대로 성로(城櫓) 12개 외곽의 동 서 북 3면에 토제를 쌓고 그 위에 3중의 목책을 설치, 길이 2,400여m 남쪽은 태화강에 면해 선박이 정박할 수 있었다.
울산왜성(蔚山倭城)의 전투 기록은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싸움은 선조 30년(1579) 12월 23 일부터 이듬해 1월 4일 까지 혈투가 벌여졌는데 이것이 제1차 싸움이었다. 선조 30년 12월 23일부터 있었던 울산왜성의 공방전은 양호(楊鎬)와 마귀(麻貴)가 울산왜성을 쳐서 전왜군의 사기를 꺾으려고 23일과 24일 이틀동안 성을 공격, 마침 축성중이라 성밖에 야영하던 적을 섬멸하고 반
 
구정의 적진과 태화강의 적 보루를 치니 이때 일대 결전이 벌어져 패한 적은 성안으로 달아나고 나오지 않았다. 이에 조.명연합군은 이듬해 1월 3일까지 매일같이치 열한 화공을 퍼붓는가하면 한편으로는 서생포왜성(西生浦倭城)에서 오는 적의 응원선단을 막으며 쳐 서 성채의 접근을 막고 별장 김응서(金應瑞)의 군은 성밖에서 적의식수원을 차단하여 적으로 하여금 농성중 크게 굶주리게 하였다. 이러한 공성에도 적은 비오듯 총포를 쏘아 왜성에 오르지 못하게하여 조명군의 공격은 번번히 실패하고 말았다. 이 때에 마침 날은 차고 비가와서 인마(人馬)의 동상이 속출하고 피아의 사기는 말할 수 없이 떨어졌다. 더욱이 성중의 적은 물이 없어 오줌을 마시고 말을 잡아 피를 빨며 벽지를 끓여먹는 등 아사직전에 이르고 있었다. 1월 4일 새벽부터 양호(楊鎬)와 마귀(麻貴)는 직접 칼을 들고 뒤처지는 자의 목을 베는 등 독전하여 최후의 총공격을 하니 군사들은 앞을 다투어 돌진하였으나 퍼붓는 적의 총탄에 희생자만 속출하고 성에 기어오르는 자가 없었다.
이 때에 적의 응원군이 염포로부터 배로 접근하고 육로로도 몰려와서 형세가 급변하자 명장 양호는 「매일 우리가 공격해도 성이
워낙 험하고 군사가 많이 없어져 이를 뺏기 힘드는데 이 판에 왜군의 구원병이 많이 있 으니 철군 했다가 뒤에 다시 공격을 꾀하겠다」면서 경주로 철군하고 후속부대는 왜군의 추 격을 받아 큰 손실을 당하고 말았다.
도산성의 제1차 싸움이 끝난 다음 豊臣秀吉은 성의 재수를 명하여 방위시설을 강화한 후 加藤淸正의 주력군 1만으로 하여금 도산성을 고수하게 하였다. 한편 제독 마귀의 군은 선조 31년(1598) 3월 29일이후 경주에 집결하고 도산성의 재공격을 준비중에 있었는데 제2차 도 산성싸움은 대략 다음과 같다. 동정군 제독 마귀 부총병 오유충(吳惟忠) 병 24,000여 조선군 별장 김응서(金應瑞) 병 5, 500여 합계 30,000명, 한편 왜군은 加藤淸正(가등청정)의 1만과 서생포왜성 수장 흑전장정(黑田長政) 5,000명 계15,000 전투의 경과를 살펴보면 경주에 집결하고 있던 명군은 부

총병 해생(解生)을 선봉장으로 하여 9월 21일 울산을 향해서 발진 학성산(鶴城山)에 공격준비진을 쳤다. 한편 좌수영에 있던 별장 김응서(金應瑞)는 동래온정(東萊溫井)의 적을 격파하여 적의 부산, 울산간의 연락로를 차단하였고 이날 해생(解生)은 직접 울산왜성의 적과 싸움을 걸어 성책 밖에 있던 천여의 적을 격파하였다. 제독 마귀는 22일 주력 2만군으로 성내의 적에 도전하니 淸正군이 성밖으로 나와 일대회전이 벌어져 이를 격파하고 그 여세를 몰아 성의 외책을 탈취하는 한편 방옥(房屋) 군량 마량을 다 불태우고 아성(牙城)에 접근하였으나 성내로 물러난 적은 빗발같은 조총을 퍼부어 더 접근을 하지 못하였다. 그 후에도 동정군을 유격전을 계속하였으나 명군이 대군임을 알고 1차전투처럼 문을 굳게 닫고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이에 제독 마귀는 군사를 거두어 경주군 모화(毛火)로 물러나서 경주에 머물렀다 시월 6일 영천성(永川城)으로 들어가고 말았다.
그 후 豊臣秀吉이 죽은 뒤 철수령에 따라 加藤淸正은 11월 18일 울산왜성 성채를 불태우고 퇴각하였다.성을 시루를 엎은 것 같다하여 “시루성”이라고도 한다. 이 성은 왜성이지만 전후에는 서생포왜성과 마찬가지로 우리 수군이 한동안 쓰고 있었다. 이 왜성은 그후 우리 수군이 한동안 쓰면서 1624년(인조 2년)~1654년(효종 5년)에는 전선창(군함 만드는 공장)을 두기도 했다. 임란때는 도산성(島山城)으로 불렀고 그후에는 학성(鶴城) 또는 시루성(甑城)으로도 불렀다.

현재는 학성공원으로 조성되면서 많은 성벽이 소실되고, 태화강변 방향과 반구동 방향에는 아직도 성벽이 남아 있습니다. 봄이면 수백거루의 벗꽃이 절정을 이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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